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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일지> 숙론 -최재천, 토론 (討論)이 아닌 숙론 (熟論) 의 시대를 위하여

by 멋진 책 읽기 2025. 4. 20.

 

우리 사회는 토론을 힘들어하고 낯설어한다. 토론을 상대방을 싸워서 이기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토론이란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공백을 마련하는 것이다. 최재천 교수는 이에 숙론 (熟論)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숙론이란 "내가 옳다"는 고집이 아니라, "나도 틀릴 수 있다"라는 인식의 변화이다. 

 

 

토론이 아닌 숙론의 시대

 

 

최재천 『숙론』을 중심으로 본 갈등 해법과 소통의 미래

 

1. 갈등의 원인: 확신의 시대, 경청의 상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갈등의 시대에 놓여 있다. 정치적 진영은 물론이고, 세대 간, 계층 간, 성별 간 충돌이 일상화된 현실이다. 갈등이 심화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최재천 교수는 『숙론』에서 그 핵심을 “확신의 시대”라고 지적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옳다고 믿으며, 그 확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태도는 상대를 ‘설득의 대상’이 아닌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전락시킨다.

 

디지털 플랫폼의 알고리즘도 갈등을 증폭시킨다. 사용자는 자신과 유사한 관점을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며, 이는 인지 편향을 강화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의 접점은 줄어들고, 결국 ‘이견’은 ‘적대’로 발전한다. 그러나 갈등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가치가 만나는 지점에서 피할 수 없이 발생하는 현상이다. 문제는 갈등의 존재가 아니라, 이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2. 토론이 아닌 숙론의 필요성: 이기려는 말, 함께하는 말

 

한국 사회에서 ‘토론’은 흔히 상대를 이기는 수단으로 오인된다. 말발로 상대를 제압하거나, 논리로 꺾는 기술로 여겨진다. 그러나 최재천 교수는 『숙론』에서 이와 같은 승부 중심의 토론 문화를 비판하며, 새로운 담론의 틀로서 ‘숙론(熟論)’을 제시한다.

 

숙론은 글자 그대로 ‘익히고, 깊이 생각하는 논의’다. 숙론의 전제는 단 하나, “나는 틀릴 수 있다”는 인식이다. 이 전제 아래에서는 자기주장을 상대에게 강요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이는 단순히 말의 내용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토론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지만, 숙론은 공동의 해법을 찾는다. 이는 민주주의의 성숙한 형태이자, 공동체적 합의를 끌어내는 유일한 방식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옳은가를 밝히는 논쟁이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모색하는 대화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숙론

3. 숙론을 통한 갈등 해결 방안: 느리지만 깊은 사회적 합의

 

숙론은 갈등을 단숨에 해소하는 마법의 지팡이는 아니다. 오히려 갈등의 본질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게 만든다. 이는 단기적인 격돌보다 더 어렵고,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숙론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갈등 해소 방안임은 분명하다.

 

첫째, 숙론은 공동체 내부의 신뢰를 회복시킨다. 서로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경험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관계를 바꾼다. 그 관계 위에서만 공동의 해답이 자란다.

 

둘째, 숙론은 사회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틀이 된다. 갈등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에서 발생한다. 그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 숙론의 출발이다.

 

셋째, 숙론은 정치와 사회 의사결정의 품격을 높인다. 법안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다수결로 밀어붙이기보다, 충분한 숙의 과정을 거쳐 사회적 합의를 도출한다면, 그 결정은 보다 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타협과 조율의 기술은 숙론의 철학과 함께할 때 진가를 발휘한다.

 

4. 숙론 교육을 위한 제언: 경청의 습관을 길러야 한다

 

숙론이 단순한 담론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다. 그 시작은 유년기 교육이다. 우리는 초등학교에서 발표와 토론은 가르치지만, ‘경청’은 가르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듣는 일, 자기와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법을 체계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

 

중등 교육과정에서는 ‘비판적 사고력’뿐 아니라 ‘공감적 사고력’을 함께 배양해야 한다. 대학에서는 과목별 논의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배경과 전공이 어우러진 융합형 숙론 수업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사회 전반에서도 ‘공론장’의 역할이 재조명되어야 한다. 단순한 공개토론이 아니라, 이해당사자들이 충분한 시간과 정보, 상호 존중의 태도를 바탕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또한 언론과 방송은 ‘논쟁’ 중심의 시청률 경쟁에서 벗어나, 숙론적 가치를 실현하는 프로그램 기획에 나설 필요가 있다. 갈등을 선정적으로 소비하는 구조가 아니라, 갈등을 깊이 탐구하고 화해로 이끄는 여정이야말로 진정한 공영 미디어의 역할일 것이다.


 다시, 말의 품격을 생각하다

『숙론』은 단순히 말하기의 기술을 다룬 책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 타인을 대하는 자세, 나를 돌아보는 사유의 깊이를 요구하는 책이다. 최재천 교수는 숙론을 통해 우리가 말의 품격을 회복하자고 제안한다. 말이란 진실을 드러내는 도구이자, 타인과 연결되는 유일한 다리다. 그 다리를 허물지 않고, 견고하게 세우는 일. 그것이 바로 ‘숙론’의 길이다.

 

이제 우리는 ‘이기기 위한 말’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말’로 전환해야 한다. 숙론은 느리지만,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갈등을 넘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이다. 그 길 위에 우리가 함께 서야 할 때다.

 

 
숙론
우리 시대의 지성인 최재천 교수가 9년간 집필해 마침내 완성한 역작 《숙론》을 출간한다. 갈등과 분열을 거듭하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손잡을 수 있을까? 최재천 교수가 찾은 해법은 ‘숙론(熟論, Discourse)’이다. 숙론이란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는 말싸움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이 왜 다른지 궁리하는 것, 어떤 문제에 대해 함께 숙고하고 충분히 의논해 좋은 결론에 다가가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난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저자 자신
저자
최재천
출판
김영사
출판일
202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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